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봉준호 감독의 영화 ‘설국열차’는 단순한 포스트아포칼립스 장르의 엔터테인먼트에 그치지 않고, 폐쇄된 시스템 안에서 벌어지는 인간 군상의 치열한 생존과 도덕적 갈등, 그리고 계층 구조의 불합리함을 집약적으로 보여주는 작품입니다. 이 영화는 전 세계적인 기후재앙 이후, 살아남은 인류가 탑승한 거대한 열차를 배경으로, 사회적 계급이 어떻게 구조화되고 재생산되는지를 은유적으로 표현합니다. 본 리뷰에서는 설국열차의 세계관을 단순한 줄거리 요약이 아닌 철학적이고 사회학적인 시각에서 분석하고자 합니다.
계급은 레일 위를 달린다: 사회계급의 고착화 구조
‘설국열차’의 가장 핵심적인 주제는 ‘계급’입니다. 열차라는 공간은 외부와 완전히 단절된 폐쇄된 사회이며, 그 내부는 극도로 구조화된 계층으로 나뉘어 있습니다. 꼬리칸은 절대다수의 하층민이 밀집한 공간으로, 물리적·정신적으로 억압받으며 살아갑니다. 반면 앞칸으로 갈수록 위생 상태, 식사 질, 생활 환경이 비약적으로 개선되며, 권력자들이 군림합니다. 이러한 설정은 현대 자본주의 사회에서의 경제적 불평등, 신분 세습, 정치적 무력감을 은유적으로 드러냅니다. 특히 꼬리칸 주민들이 혁명을 통해 앞칸으로 이동하려는 과정은 단순한 반란이 아니라 계급 해체를 위한 투쟁으로 해석될 수 있습니다. 하지만 이 투쟁이 완전한 자유와 평등으로 이어지지 않는다는 점에서, 봉준호 감독은 사회 구조 자체가 자율적으로 평등해질 수 없다는 회의적 시각을 드러냅니다. 극 중 윌포드의 “질서 없이는 생존도 없다”는 대사는, 계급이 악이 아니라 필요조건이라는 보수적 논리의 전형입니다. 그에 반해 커티스는 그 시스템을 무너뜨리는 선택을 함으로써, 인간의 존엄성과 자유 의지를 강조합니다. 이처럼 설국열차는 계급사회를 단순히 비판하는 것을 넘어, 그 존재 근거와 지속 메커니즘에 대한 철학적 사유를 유도합니다.
본능이 지배하는 순간: 인간의 생존본능과 폭력성
설국열차는 생존이라는 극단적 조건 속에서 인간이 어디까지 본성을 드러낼 수 있는지를 냉철하게 보여주는 작품입니다. 꼬리칸 사람들은 단백질 블록이라는 정체불명의 식량을 섭취하며 생존하고, 배급된 물자에 따라 질서가 유지됩니다. 하지만 그 질서가 억압에 기반하고 있다는 점에서 이는 생존이 아닌 생존 강요의 상태입니다. 영화에서 가장 충격적인 장면 중 하나는 과거 커티스가 “나는 사람을 먹었다”고 고백하는 장면입니다. 극한 상황에서는 도덕적 가치가 무너지고, 생존 본능만이 인간을 지배하게 된다는 점을 보여줍니다. 그러나 감독은 인간이 단지 본능에만 지배당하지 않는 존재임을 동시에 암시합니다. 요나와 티미라는 아이들의 존재는, 세대 교체와 새로운 희망의 상징으로 기능하며, 생존 이후를 고민하게 합니다. 또한 열차 내부의 무차별적 폭력 장면들 도끼를 든 무장경찰, 불을 끄고 싸우는 장면, 방독면을 쓴 학살자들은 생존이라는 명분 아래 자행되는 비인간적 행위의 정당화를 보여줍니다. 이는 현대 사회에서도 위기 상황 시 권위주의적 억압이 얼마나 쉽게 재현되는지를 떠올리게 합니다. 영화는 생존을 위해 무엇까지 포기할 수 있는가라는 질문을 던지며, 인간 본성에 대한 근본적 고찰을 이끕니다.
모든 것이 정당한가: 윤리적 딜레마와 선택
설국열차가 단순히 구조적인 메시지 전달에 그치지 않고 깊은 여운을 남기는 이유는, 영화 전반에 걸쳐 ‘윤리적 딜레마’가 끊임없이 제기되기 때문입니다. 주인공 커티스는 꼬리칸 주민들의 리더로서 혁명을 주도하지만, 그 자신이 과거에 저지른 비인간적 행위를 후회하며 괴로워합니다. 그는 리더가 될 자격이 없다고 고백하고, 결국 열차 시스템을 통째로 파괴하는 결정을 내립니다. 이러한 선택은 단순한 승리나 해방이 아니라, ‘희생’과 ‘파괴’를 수반하는 결정이라는 점에서 무거운 윤리적 질문을 남깁니다. 시스템을 유지하기 위해 아이를 기계 부품처럼 사용하는 윌포드의 방식이든, 모든 것을 없애고 새로 시작하자는 커티스의 방식이든, 둘 다 비인간적인 요소를 품고 있다는 점에서 진정한 해답은 없습니다. 결국 영화는 ‘정답 없는 선택’의 무게를 관객에게 전가합니다. 폭력으로 폭력을 끊을 수 있는가, 억압을 종식시키기 위해 새로운 억압이 필요한가 등의 질문은 현재 우리가 마주한 정치적, 사회적 현실과 맞닿아 있습니다. 이처럼 설국열차는 하나의 이야기이자, 인간 사회 전체를 압축한 윤리적 실험장이 됩니다. 설국열차는 단지 종말 이후의 생존담이 아닙니다. 그것은 지금 우리가 살아가는 사회를 상징화한 메타포이며, 계급, 폭력, 생존, 윤리 등 인간 존재의 핵심 주제를 극단적 방식으로 드러냅니다. 봉준호 감독은 이 영화를 통해 관객에게 불편한 질문을 던집니다. 우리가 살아가는 시스템은 과연 공정한가? 변화는 가능한가? 그리고 그 변화는 어떤 대가를 요구하는가? 이러한 질문에 대한 답은 영화가 끝난 후에도 오래도록 생각할 거리를 남깁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