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9년 개봉한 영화 조커(Joker)는 단순한 악당 탄생기가 아닙니다. 이 작품은 현대 사회의 구조적 모순, 감정 억압, 자유의지의 경계 등을 철저하게 파고들며, 오늘날을 살아가는 우리 모두에게 질문을 던지는 현실 비판의 영화입니다. 가상의 캐릭터임에도 불구하고, ‘조커’는 현실보다 더 현실 같은 존재로 다가옵니다.
조커는 왜 웃지 못했는가
조커, 본명 아서 플렉은 웃음을 직업으로 삼고 살아가는 광대입니다. 하지만 그 웃음은 진심이 아니었고, 그는 오히려 자신이 원치 않는 순간에 웃음이 터지는 병적 상태를 가지고 있습니다. 사회는 그를 오해하고 혐오하며, 결국엔 고립시킵니다. 아서가 갖고 있는 질환은 단지 의학적인 문제가 아니라, 감정 표현을 통제하는 사회 구조의 압력이 만들어낸 부작용처럼 보입니다. 사람들은 언제 웃어야 하고 언제 울어야 하는지를 끊임없이 강요받으며 살아가고 있습니다.
아서의 웃음은 그 틀에서 벗어난 비정상으로 여겨졌고, 그를 사회의 외곽으로 밀어냅니다. 이 지점에서 영화는 질문을 던집니다. “감정조차 사회가 정해주는 시대에, 우리는 얼마나 진짜 감정을 경험하고 있는가?” 아서가 겪는 억압은 단지 질병의 문제가 아니라 사회적 정상성이라는 이름 아래 강요되는 일방적인 기준의 폭력입니다.
특히 그가 의료 서비스를 받지 못하게 되는 장면은 공공복지 시스템의 붕괴를 상징적으로 보여줍니다. 조커가 웃지 못하는 이유는 병 때문만이 아니라, 그의 슬픔과 분노를 웃음으로 감추기를 바라는 사회 때문입니다. 영화는 이 억지스러운 ‘감정의 포장’을 벗겨내며, 그 이면에 있는 고통과 울분을 시각적으로 드러냅니다. 웃음이 주는 불편함, 그것은 곧 우리가 무시해온 타인의 고통일 수 있음을 조커는 보여줍니다.
조커가 된다는 것: 시스템이 만든 괴물
아서가 조커로 변화해 가는 과정은 단지 개인의 붕괴로 보기 어렵습니다. 그는 반복되는 무시와 외면, 그리고 폭력 속에서 점점 광기의 세계로 나아갑니다. 영화는 이 과정을 단순히 정신병적 일탈이 아닌, 사회 구조의 결과물로 묘사합니다. 아서는 진심으로 타인과 소통하려 하지만, 사회는 그런 그를 계속해서 배제합니다.
복지 체계는 붕괴되고, 약자는 돌봄에서 제외되며, 언론은 고통을 희화화합니다. 조커가 된다는 것은 단지 ‘악인이 되는 것’이 아니라, 지속적인 배제로 인해 더 이상 인간으로 존중받지 못한 결과입니다. 그가 ‘조커’라는 정체성을 받아들이는 순간은 사회가 그를 사람으로 대하지 않기로 결정한 그 순간과 정확히 겹칩니다. 이 영화는 조커의 범죄를 정당화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그가 왜 그런 선택을 하게 되었는지를 따라가며, 시스템적 결함이 어떻게 개인의 파괴로 이어지는지를 보여줍니다.
조커는 괴물이 아니라, 괴물이 되어야만 살아남을 수 있었던 한 사람입니다. 현실에서도 우리는 뉴스 속에서 ‘왜 저런 일이?’라고 생각하는 순간들을 자주 마주합니다. 그러나 대부분의 사건은 배경 없이 설명되지 않습니다. 조커는 사회가 책임져야 할 폭력의 결과를 ‘개인의 일탈’로 포장하고 넘어가는 방식에 문제를 제기합니다. 결국 조커가 된다는 것은 단지 미쳐가는 것이 아니라, 세상의 규범을 거부하고 새로운 정체성을 받아들이는 선택이기도 합니다. 영화는 관객이 그의 폭력에 동조하게 만들지 않지만, 최소한 그를 ‘이해’하도록 유도합니다. 이것이 조커가 강력한 사회적 은유로 읽히는 이유입니다.
조커, 자유의지로 악을 선택했는가
아서가 조커로 거듭나는 마지막 순간, 그는 말합니다. “당신은 나를 이해할 수 없어요. 내가 겪은 일을 당신은 모르니까요.” 이 말은 단순한 감정 호소가 아닙니다. 그것은 그가 조커가 되는 과정을 ‘선택’으로 받아들였다는 선언입니다. 영화는 이 대목에서 인간의 자유의지라는 철학적 주제를 전면에 내세웁니다.
아서는 결국 ‘사회가 정한 정상성’이라는 시스템을 거부하고, ‘광기’라는 자신의 새로운 정체성을 수용합니다. 그는 타인의 시선을 신경 쓰지 않고 스스로를 정당화하며, 자신의 행동에 의미를 부여합니다. 이는 기존의 선악 구조에서 벗어나 실존적 존재로 나아가는 행위입니다. “나는 존재한다. 비록 네가 이해하지 못할지라도.” 이 선언은 절망의 끝에서 만들어진 의지이자, 분노의 실천입니다. 하지만 이 자유의지가 과연 진정한 자유일까요? 철학자들은 종종 진정한 자유의지는 환경과 조건에서 벗어난 상태에서 가능하다고 말합니다.
그러나 아서의 선택은 이미 수많은 사회적 폭력과 배제, 고립 속에서 제한되고 왜곡된 결과입니다. 따라서 조커의 선택은 ‘왜곡된 자유’이며, 구조가 허용한 유일한 탈출구일지도 모릅니다. 그는 더 이상 시스템에 순응하지 않고, 자신의 방식으로 세상과 싸우기로 합니다. 조커가 웃으며 범죄를 저지를 때, 그 웃음은 자유의 웃음이자 마지막 저항의 몸짓입니다. 관객은 불편함 속에서 그가 진짜 ‘자유’인지, 아니면 더욱 정교한 통제의 산물인지 고민하게 됩니다. 조커는 우리에게 묻습니다. “당신은 당신의 삶을 진짜 선택했습니까?” 이 질문은 단지 영화 속 인물에게만 해당하는 것이 아니라, 영화를 보는 모든 이에게 향하는 물음입니다. 자유의지란 과연 존재하는가? 조커는 그 답을 쉽게 말하지 않지만, 그 질문을 지워버릴 수 없게 만듭니다.
결론
조커는 단지 한 남자의 비극적 일탈을 그리는 영화가 아닙니다. 그는 이 시대를 살아가는 우리 모두의 얼굴이기도 합니다. 그의 고통, 분노, 외로움, 그리고 왜곡된 선택은 누군가의 일상 속에 존재합니다. 그렇기에 조커는 더 이상 픽션이 아니라 현실보다 더 리얼한 존재로 다가옵니다. 다시 조커를 본다는 건, 결국 우리 자신의 그림자를 마주하는 일이기도 합니다.